티스토리 뷰

이순신이 옥포에서 첫번 싸움 이날에 경상도 소비포(所非浦) 바다 가운데서 결진(結陣)하고 밤을 지낸 후, 이튿날 5일과 6일 양일간에 경상 전라 양도의 제장들이 뒤를 좇아 따라오는 자가 많거늘, 한곳에 모으고 약속을 제삼 부탁한 후에 거제도 송미포(松未浦) 바다 가운데 이르러 날이 저물매, 거기서 밤을 지내고 7일 새벽에 발선하여 적선이 있는 곳으로 향할새, 당일 오시(午時)에 옥포 앞바다에 이르니, 척후대장(斥候將) 김완(金浣) 등이 신기총(神機銃)을 놓아 전면에 왜가 있는 것을 보고하거늘, 이순신이 제장을 신칙하여 산과 같이 정중하고 망동하지 말라고 군중에 전령하고, 대오를 정제히 하여 일제히 나아간 즉, 왜선 50척이 정박하여 있는데, 그 배가 사면에 오채가 영롱한 장막으로 둘렀고, 장막가에는 홍기와 백기를 어지러이 달아서 바람에 펄럭펄럭 날리매, 사람의 눈이 현혹하더라. 우리 군중의 장사들이 일제히 분발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동서로 충돌하니, 적병이 창황망조하여, 탄환에 맞고 살에 꾀어 유혈이 낭자하며, 배에 실었던 물건을 분주히 물에 던지고 일시에 흩어지며, 물에 빠져 죽는 자는 헤아릴 수 없고, 물에 내려 도망하는 자는 앞뒤로 이어졌는지라, 우리 군사는 더욱 분발하게 싸워 왜선 수십 척을 격파하고 소화하니 온 바다 가운데에 화염이 창천하더라. 산에 올라간 적병을 수탐하여 잡으려다가 산세가 험준하고 수목이 무성하여 용신(容身)할 곳이 없을 뿐더러 날이 또한 저물었음으로 부득이하여 영등포 앞바다로 물러가 주둔하여 밤을 지내기를 꾀하더니, 신시(申時) 쯤 되어 큰 왜선 5척이 졸지에 와서 거리가 불원한 곳에 떠있거늘 즉시 김포 앞바다로 추격하여 크게 파한 후에 창원 땅 남포 앞바다에서 밤을 지내고, 8일 이른 아침에 진해(鎭海) 고리양(古里梁)에 왜선이 정박하여 있다는 보고가 오거늘, 즉시 발선하여 고성(固城) 적진포(赤珍浦)에서 왜선 13척이 있음을 보고, 여러 군함이 돌격하여 또 크게 이기니라. 군사를 잠깐 쉬어 아침을 먹으려 하더니, 적진포 근처에 사는 백성 이신동(李信同)이라 하는 자가 산상에서 우리나라 국기를 바라보고 등에 아이를 업고 엎어지며 자빠지며 울고 포변으로 향하여 오거늘, 작은 배로 실어 들어온 후에 도적의 종적을 물으니, 이르되 “왜적들이 어제 이 포구에 와서 인명을 살해하며 부녀를 겁탈하고 재물을 우마로 실어다가 그 배에 싣고, 초경쯤 되어 중류에 배를 띄우고 소를 잡고 술을 먹으며, 노래 소리와 저 소리가 새벽이 되도록 끊이지 아니하다가 오늘 이른 아침에 고성 등지로 향하더이다.” 하고 또 가로되, “소민은 노모와 처자를 난중에 서로 잃고 향할 바를 알지 못하나이다.” 하며, 눈물이 비오듯하거늘 이공이 측은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진중에 머물러 두고자 하니 그 어미와 그 처의 거처를 탐지하기 위하여 머물러 있기를 즐겨 아니하는지라. 이순신 등의 일행장사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분격하여 왜적과 살기를 같이 아니하기로 맹세하고 적선의 정박한 곳을 찾아 향하니라. 이 싸움에 왜적의 사상자는 수천에 지나고, 우리 진중에 순천대장(順天代將) 이선지(李先枝)가 왼편 팔을 총에 맞아 상하였더라.          제7장 이순신이 옥포에서 첫번 싸움 이날에 경상도 소비포(所非浦) 바다 가운데서 결진(結陣)하고 밤을 지낸 후, 이튿날 5일과 6일 양일간에 경상 전라 양도의 제장들이 뒤를 좇아 따라오는 자가 많거늘, 한곳에 모으고 약속을 제삼 부탁한 후에 거제도 송미포(松未浦) 바다 가운데 이르러 날이 저물매, 거기서 밤을 지내고 7일 새벽에 발선하여 적선이 있는 곳으로 향할새, 당일 오시(午時)에 옥포 앞바다에 이르니, 척후대장(斥候將) 김완(金浣) 등이 신기총(神機銃)을 놓아 전면에 왜가 있는 것을 보고하거늘, 이순신이 제장을 신칙하여 산과 같이 정중하고 망동하지 말라고 군중에 전령하고, 대오를 정제히 하여 일제히 나아간 즉, 왜선 50척이 정박하여 있는데, 그 배가 사면에 오채가 영롱한 장막으로 둘렀고, 장막가에는 홍기와 백기를 어지러이 달아서 바람에 펄럭펄럭 날리매, 사람의 눈이 현혹하더라. 우리 군중의 장사들이 일제히 분발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동서로 충돌하니, 적병이 창황망조하여, 탄환에 맞고 살에 꾀어 유혈이 낭자하며, 배에 실었던 물건을 분주히 물에 던지고 일시에 흩어지며, 물에 빠져 죽는 자는 헤아릴 수 없고, 물에 내려 도망하는 자는 앞뒤로 이어졌는지라, 우리 군사는 더욱 분발하게 싸워 왜선 수십 척을 격파하고 소화하니 온 바다 가운데에 화염이 창천하더라. 산에 올라간 적병을 수탐하여 잡으려다가 산세가 험준하고 수목이 무성하여 용신(容身)할 곳이 없을 뿐더러 날이 또한 저물었음으로 부득이하여 영등포 앞바다로 물러가 주둔하여 밤을 지내기를 꾀하더니, 신시(申時) 쯤 되어 큰 왜선 5척이 졸지에 와서 거리가 불원한 곳에 떠있거늘 즉시 김포 앞바다로 추격하여 크게 파한 후에 창원 땅 남포 앞바다에서 밤을 지내고, 8일 이른 아침에 진해(鎭海) 고리양(古里梁)에 왜선이 정박하여 있다는 보고가 오거늘, 즉시 발선하여 고성(固城) 적진포(赤珍浦)에서 왜선 13척이 있음을 보고, 여러 군함이 돌격하여 또 크게 이기니라. 군사를 잠깐 쉬어 아침을 먹으려 하더니, 적진포 근처에 사는 백성 이신동(李信同)이라 하는 자가 산상에서 우리나라 국기를 바라보고 등에 아이를 업고 엎어지며 자빠지며 울고 포변으로 향하여 오거늘, 작은 배로 실어 들어온 후에 도적의 종적을 물으니, 이르되 “왜적들이 어제 이 포구에 와서 인명을 살해하며 부녀를 겁탈하고 재물을 우마로 실어다가 그 배에 싣고, 초경쯤 되어 중류에 배를 띄우고 소를 잡고 술을 먹으며, 노래 소리와 저 소리가 새벽이 되도록 끊이지 아니하다가 오늘 이른 아침에 고성 등지로 향하더이다.” 하고 또 가로되, “소민은 노모와 처자를 난중에 서로 잃고 향할 바를 알지 못하나이다.” 하며, 눈물이 비오듯하거늘 이공이 측은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진중에 머물러 두고자 하니 그 어미와 그 처의 거처를 탐지하기 위하여 머물러 있기를 즐겨 아니하는지라. 이순신 등의 일행장사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분격하여 왜적과 살기를 같이 아니하기로 맹세하고 적선의 정박한 곳을 찾아 향하니라. 이 싸움에 왜적의 사상자는 수천에 지나고, 우리 진중에 순천대장(順天代將) 이선지(李先枝)가 왼편 팔을 총에 맞아 상하였더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