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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제4전(부산(釜山) 임진·계사년(1592∼1593)간의 각처 번화한 도회처에는 왜인들이 흙을 쌓고 집을 지어, 혹 4,5백 집 되는 곳도 있으며, 혹 2,3백 집 되는 곳도 있어서 당당한 한국을 저의 집 식민지로 보는 것은 곧 당시 풍신수길의 욕심으로 이웃 의를 생각지 아니하고, 이름 없는 군사를 일으켜 발연히 서로 범하다가 우리의 절대한 장수 이순신을 만나서 한 번 패하고, 두 번 패하고, 세번 패하는 데까지 이르러서, 몇 만 명 용맹한 군사를 모두 어복 중에 장사하였으니, 저희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어찌 감히 싸우기를 다시 생각하리요? 불과 삼십육계 중에 상책만 생각할 뿐이로다. 임진년 사기(史記)를 읽는 자가 부산 싸움을 보면 술잔을 높이 들고 “조선 만세, 조선 수군 만세, 조선 수군통제사 이순신 만세!”를 부를 만하도다. 경상도 연해변에 왜적의 그림자가 영영 끊어지고, 각 지방에 가득하던 도적들이 낮이면 숨고 밤으로 행하여 도망할 생각으로 바닷가로 모였더라. 대적의 군함은 5백여 척이요, 대적의 군사가 십수만이라. 이순신이 경상우도 순찰사 김쉬(金倅)의 관문(關文)을 받아 보고, 전라 좌우도 전선 합 74척을 정제하여, 계사년(1593년) 2월 24일에 발선하여, 27일에 웅천 자포(紫浦)에 이르니, 고성·진해·창원 등지에 유둔하는 왜병은 전라도 군사가 온다 함을 듣고, 도망하여 간 지가 이미 수일이나 되었더라. 이튿날 새벽에 양산(梁山)과 김해 두 고을 앞바다로 향하더니 마침 그때에 창원 사람 정말석(丁末石)이 왜적에게 잡혔다가 밤을 타서 도망하여 와서 왜적이 가덕도(加德島) 북편 서녘 언덕에 은복(隱伏)하여 있다고 와서 고하거늘, 29일 새벽에 닭의 소리를 듣고, 배를 띄워서 가덕에 이른즉 종적이 묘연한지라. 장림포(長林浦)에 이르니 큰 왜선 4척과 적은 배 2척이 있거늘, 큰 배 1척을 쳐서 파하고, 좌우로 군사를 나누어 두 강으로 들어가고자 한즉, 강 어구가 좁아서 싸움을 용납하기 어려움으로 군사를 물리고, 9월 1일에 몰운대(沒雲臺)를 지나다가 동풍에 파도가 흉용한 데서 큰 왜선 5척을 쳐서 파하고, 다대포(多大浦)에 이르러 큰 왜선 8척을 쳐서 파하고, 서평포(西平浦)에 이르러 큰 왜선 9척을 쳐서 파하고, 절영도(絶影島)에 이르러 큰 왜선 2척을 쳐서 파하고, 부산 앞바다에 이르러 탐지한즉 왜선이 대개 5백여 척이라. 선창 동편에 선봉 큰 배 4척이 초량항(草梁項)에서 왕래하거늘, 이순신이 원균과 이억기로 더불어 약속하여 가로되, “우리 군사의 위엄으로 어찌 이것을 치지 아니 하리요?” 하고, 기를 들어 싸움을 독려하니, 우부장 녹도만호 정운과 거북선 돌격장군관 이언량(李彦良)과 전(前) 부장 방답첨사 이순신과 좌부장 신호 등이 먼저 앞으로 나가서 선봉선 4척을 우선 쳐서 파하고, 이김을 타서 장사진법으로 돌진하나, 동으로 5리쯤에 결진한 왜적이 우리 군사의 위풍을 바라보고 감히 나오는 자가 없고, 우리 군사가 그 앞으로 곧 나아가 충돌한즉 모든 도적이 일시에 산으로 기어올라가서 6곳으로 나누어 진치고, 내려다보며 총을 놓으니, 탄환이 우박같이 내리며, 혹 편전도 쏟아져 우리 배를 많이 맞히는지라. 우리 배의 모든 군사의 분기가 더욱 심하여 죽기를 무릅쓰고 다투어 충돌할새, 장군전(將軍箭)·피령전(皮翎箭)·장편전(長片箭)·소철환(小鐵丸)·대철환(大鐵丸) 등 각색 화살과 도총 탄환을 일제히 발하며, 종일토록 크게 싸워서 왜선 1백여 척을 파멸하니, 왜적이 그 죽은 시체를 불사르는데, 그 냄새가 수백 보에 가득하더라. 날이 어두우매, 좌우 도적에게 앞뒤로 침략을 받을까 염려하여, 대장으로 더불어 배를 돌려서 3경에 가덕도에 이르러 밤을 지내고, 이튿날 다시 그 소굴을 몰수히 소탕할 계교를 생각할새, 다만 물에서 패하면 육지로 달아나고, 육지에서 패하면 물로 달아나는 것은 저 도적의 장기라. 이제 도적의 배만 다 분멸하면, 저희는 반드시 육지에 올라가서 노략질을 행하리니, 그런즉 생령의 가혹한 화가 또 어떠하리요. 이공이 이것을 깊이 경계하여, 경상도 육군 제장과 수륙이 함께 치기를 기약하리라 계교를 정하고 싸움을 잠시 정지하니라. 이번 싸움은 비록 마지막 궁구를 토평한데 불과하나 적군의 사상자는 한산도 싸움보다 적지 아니하더라. 승전고 소리는 귀에 양양한데, 온 백성이 한 목소리로 이장군을 찬송하니 대장부의 영광이 이에 이르러서 극진하도다. 그러나 이때에 이순신의 흉중에는 바늘이 찌르는 듯 하고, 1만 화살이 꽂힌 듯 두 줄기 슬픈 눈물이 눈에서 방방히 흐르니, 이는 무엇을 위하여 이같이 하느뇨? 가로되, 녹도만호정운의 전사함을 슬퍼함이로다. 정운은 변란이 일어난 이후로 이순신과 뜻을 같이 하고 일을 같이 하던 사람인데, 그 충의가 금석을 꿸 만하여, 매양싸움을 당하매, 몸을 분발하여, 먼저 나아가서 큰 도적을 한 입으로 삼키지못함을 한하며, 자기 한 몸의 죽고 사는 것은 도외(度外)로 부치는 사람이라, 이번 싸움에 도적의 굴혈을 무릅쓰고 돌진하다가, 무도한 도적의 탄환에 머리를 맞아서 드디어 죽으니, 이공이 글을 지어 제사하고 그 애통함은 이루 형언키 어렵더라.          제10장 이순신의 제4전(부산(釜山)) 임진·계사년(1592∼1593)간의 각처 번화한 도회처에는 왜인들이 흙을 쌓고 집을 지어, 혹 4,5백 집 되는 곳도 있으며, 혹 2,3백 집 되는 곳도 있어서 당당한 한국을 저의 집 식민지로 보는 것은 곧 당시 풍신수길의 욕심으로 이웃 의를 생각지 아니하고, 이름 없는 군사를 일으켜 발연히 서로 범하다가 우리의 절대한 장수 이순신을 만나서 한 번 패하고, 두 번 패하고, 세번 패하는 데까지 이르러서, 몇 만 명 용맹한 군사를 모두 어복 중에 장사하였으니, 저희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어찌 감히 싸우기를 다시 생각하리요? 불과 삼십육계 중에 상책만 생각할 뿐이로다. 임진년 사기(史記)를 읽는 자가 부산 싸움을 보면 술잔을 높이 들고 “조선 만세, 조선 수군 만세, 조선 수군통제사 이순신 만세!”를 부를 만하도다. 경상도 연해변에 왜적의 그림자가 영영 끊어지고, 각 지방에 가득하던 도적들이 낮이면 숨고 밤으로 행하여 도망할 생각으로 바닷가로 모였더라. 대적의 군함은 5백여 척이요, 대적의 군사가 십수만이라. 이순신이 경상우도 순찰사 김쉬(金倅)의 관문(關文)을 받아 보고, 전라 좌우도 전선 합 74척을 정제하여, 계사년(1593년) 2월 24일에 발선하여, 27일에 웅천 자포(紫浦)에 이르니, 고성·진해·창원 등지에 유둔하는 왜병은 전라도 군사가 온다 함을 듣고, 도망하여 간 지가 이미 수일이나 되었더라. 이튿날 새벽에 양산(梁山)과 김해 두 고을 앞바다로 향하더니 마침 그때에 창원 사람 정말석(丁末石)이 왜적에게 잡혔다가 밤을 타서 도망하여 와서 왜적이 가덕도(加德島) 북편 서녘 언덕에 은복(隱伏)하여 있다고 와서 고하거늘, 29일 새벽에 닭의 소리를 듣고, 배를 띄워서 가덕에 이른즉 종적이 묘연한지라. 장림포(長林浦)에 이르니 큰 왜선 4척과 적은 배 2척이 있거늘, 큰 배 1척을 쳐서 파하고, 좌우로 군사를 나누어 두 강으로 들어가고자 한즉, 강 어구가 좁아서 싸움을 용납하기 어려움으로 군사를 물리고, 9월 1일에 몰운대(沒雲臺)를 지나다가 동풍에 파도가 흉용한 데서 큰 왜선 5척을 쳐서 파하고, 다대포(多大浦)에 이르러 큰 왜선 8척을 쳐서 파하고, 서평포(西平浦)에 이르러 큰 왜선 9척을 쳐서 파하고, 절영도(絶影島)에 이르러 큰 왜선 2척을 쳐서 파하고, 부산 앞바다에 이르러 탐지한즉 왜선이 대개 5백여 척이라. 선창 동편에 선봉 큰 배 4척이 초량항(草梁項)에서 왕래하거늘, 이순신이 원균과 이억기로 더불어 약속하여 가로되, “우리 군사의 위엄으로 어찌 이것을 치지 아니 하리요?” 하고, 기를 들어 싸움을 독려하니, 우부장 녹도만호 정운과 거북선 돌격장군관 이언량(李彦良)과 전(前) 부장 방답첨사 이순신과 좌부장 신호 등이 먼저 앞으로 나가서 선봉선 4척을 우선 쳐서 파하고, 이김을 타서 장사진법으로 돌진하나, 동으로 5리쯤에 결진한 왜적이 우리 군사의 위풍을 바라보고 감히 나오는 자가 없고, 우리 군사가 그 앞으로 곧 나아가 충돌한즉 모든 도적이 일시에 산으로 기어올라가서 6곳으로 나누어 진치고, 내려다보며 총을 놓으니, 탄환이 우박같이 내리며, 혹 편전도 쏟아져 우리 배를 많이 맞히는지라. 우리 배의 모든 군사의 분기가 더욱 심하여 죽기를 무릅쓰고 다투어 충돌할새, 장군전(將軍箭)·피령전(皮翎箭)·장편전(長片箭)·소철환(小鐵丸)·대철환(大鐵丸) 등 각색 화살과 도총 탄환을 일제히 발하며, 종일토록 크게 싸워서 왜선 1백여 척을 파멸하니, 왜적이 그 죽은 시체를 불사르는데, 그 냄새가 수백 보에 가득하더라. 날이 어두우매, 좌우 도적에게 앞뒤로 침략을 받을까 염려하여, 대장으로 더불어 배를 돌려서 3경에 가덕도에 이르러 밤을 지내고, 이튿날 다시 그 소굴을 몰수히 소탕할 계교를 생각할새, 다만 물에서 패하면 육지로 달아나고, 육지에서 패하면 물로 달아나는 것은 저 도적의 장기라. 이제 도적의 배만 다 분멸하면, 저희는 반드시 육지에 올라가서 노략질을 행하리니, 그런즉 생령의 가혹한 화가 또 어떠하리요. 이공이 이것을 깊이 경계하여, 경상도 육군 제장과 수륙이 함께 치기를 기약하리라 계교를 정하고 싸움을 잠시 정지하니라. 이번 싸움은 비록 마지막 궁구를 토평한데 불과하나 적군의 사상자는 한산도 싸움보다 적지 아니하더라. 승전고 소리는 귀에 양양한데, 온 백성이 한 목소리로 이장군을 찬송하니 대장부의 영광이 이에 이르러서 극진하도다. 그러나 이때에 이순신의 흉중에는 바늘이 찌르는 듯 하고, 1만 화살이 꽂힌 듯 두 줄기 슬픈 눈물이 눈에서 방방히 흐르니, 이는 무엇을 위하여 이같이 하느뇨? 가로되, 녹도만호정운의 전사함을 슬퍼함이로다. 정운은 변란이 일어난 이후로 이순신과 뜻을 같이 하고 일을 같이 하던 사람인데, 그 충의가 금석을 꿸 만하여, 매양싸움을 당하매, 몸을 분발하여, 먼저 나아가서 큰 도적을 한 입으로 삼키지못함을 한하며, 자기 한 몸의 죽고 사는 것은 도외(度外)로 부치는 사람이라, 이번 싸움에 도적의 굴혈을 무릅쓰고 돌진하다가, 무도한 도적의 탄환에 머리를 맞아서 드디어 죽으니, 이공이 글을 지어 제사하고 그 애통함은 이루 형언키 어렵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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