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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의 마지막 (1)풍신수길의 죽음과 우희다수가의 도망 (2)행장과 청정의 애걸 (3)명나라의 구원 (4)이순신의 교제 (5)이순신의 도적으로 더불어 함께 없어지리라 하는 결심 풍신수길이 ‘한 번 뛰어 대명국(大明國)을 답평한다’하는 쾌담을 발하여 길을 빌어서 괵국(虢國)을 멸하던 계교를 써서 우리나라를 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매, 즉시 우희다수가와 가등청정과 소서행장 등 제장을 보내어 30만 군을 거느리고 세 길로 호호탕탕히 조선을 향하여 올 새, 그 발발한 욕심이 팔도를 한 번에 삼킬듯이 하다가 거연히 경상·전라도 바다 어구에서 하늘이 내리신 일대 명장에게 막힌 바가 되어, 수로로 향한 모든 왜병을 어복 중에 장사하고, 분기 대발하여 8년을 두고 계속하여 군사를 파송하여 싸우다가 연하여 패하매, 이에 피를 토하고 죽으니, 양국간 전쟁이 저으기 결말 될 기회가 돌아왔더라. 수군의 승첩을 장담하던 우희다수가는 이에 이르러, 그 패할 줄을 미리 알고 군사를 버리고 먼저 도망하였는데, 행장과 청정은 내지에 깊이 들어왔다가 육지에 오르면 의병이 둘러싸고, 물로 내려간즉 삼도 수군이 막히어 진퇴유곡의 경우를 당하였는데, 행장은 순천(順天)에 둔쳤으며, 청정은 울산(蔚山)에 둔치고, 각지로 향하여 싸우려다가, 청정은 도원수 권율과 이덕형(李德馨)에게 에워싸인 바가 되어, 도산성(島産城)중에서 물 한 잔을 얻어마시지 못하고 여러 날을 곤하게 지내며, 행장은 전라도에 있어 그 형세로 대적하지 못할 줄을 헤아리고, 여러 번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청하더라. 왜적과 불공대천하기로 깊이 맹세하던 이순신이 어찌 저희 화친의 청구함을 허락하리요? 사자를 거절하고 더욱 군사를 나아가 도적의 진을 핍박할 새, 선묘조(1589) 무술 6월 27일에 고금도(古今島)로 진을 옮기니, 이는 전라도 바다 어구에 제일 요해처이러라. 승군을 모집하여 각지에 주둔하며, 농민을 모아 섬 중에서 농사를 짓게 하고, 정예한 기병을 나누어 사처로 보내어 돌아다니며 노략질하는 도적을 초멸하고, 행장과 청정을 깊은 천참에 가두어 두고, 그 군사가 주리고 기운이 다하거든 소멸하기로 계교를 정하더니, 7월 16일에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이 수군 5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내려와서 우리 군사와 합하니, 수군의 형세가 일층 장하더라. 그러나 진린은 원래 성품이 사납고 노하기를 잘하는 자로 유명한 사람이라. 그 나라의 동렬되는 제장과도 서로 좋아하는 자가 없으니, 하물며 언어도 통치 못하고 풍속도 같지 아니한 타국 장수와 시종 틀림이 없기를 어찌바라리요. 두 장수가 한 번 틀리면, 두 나라 군사가 필연 요동되리니, 두나라 군사가 한 번 요동이 되면, 저 왜적을 토평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그틈을 타서 우리 군사를 해롭게 하기가 쉬울지라. 그런고로 조정이 근심하고 주상께서도 진린을 후대하라시는 성지를 내리시며, 영의정은 진린을 잘 사귀라는 친필 편지를 하였더라. 비록 그러나 이통제사는 심중에는 이미 다 정한 계교가 있어서, 유인의 수단으로 진린을 대접하더라. 진린의 군사가 처음 이르매, 이순신이 즉시 소를 잡고 술을 내어, 진린의 제장을 대접하여 크게 인심을 열복케 하더니, 얼마 아니하여 그 군사가 사면으로 나가서 우리 백성의 재물을 노략질하는지라. 이순신이 군사와 백성에게 영을 내려 여간 집들을 모두 훼철하여 옮기게 하고, 자기도 금침과 의복을 모두 배로 옮기더니, 진린이 그 곳곳에 가옥을 훼철하는 광경을 보고, 심히 괴이히 여겨 사람을 이순신에게 보내어 묻거늘, 순신이 가로되, “도독의 휘하 군졸이 다만 노략질하기로 일삼으니 인민이 견디기 어려우므로 각각 집을 거두어 멀리 떠나려 한즉, 나는 장수가 되어 무슨 면목으로 홀로 이에 머물러 있으리요. 그러므로 나도 또한 진도독을 하직하고 멀리떠나려 하노라.” 진린이 이 말을 듣고 대경하여 급히 순신의 전에 이르러, 순신의 손을 잡고 가로되, “만일 장군이 가면, 린은 누구로 더불어 도적을 방비하리요?” 하며 간걸하거늘, 순신이 이에 강개히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우리나라가 왜적의 화를 입은 지 지금 8년이라. 우리 성읍(城邑)을 불사르며, 우리 인민을 살해하고, 우리 분묘를 발굴하며, 우리 재산을 약탈하여, 부모는 그 자손을 부르고 통곡하며, 부녀는 그 남편을 생각하고 통곡하고, 가옥이 있는 자는 그 가옥을 잃으며, 재산이 있는 자는 그 재산을 잃어서, 이제 팔도 인민이 왜병이라 하는 말만 들어도 모두 심골이 아프지 않을 리가 없으니, 순신이 비록 준준준한 일개 무부(武夫)에 지나지 못하나, 또한 천성을 갖춘 자이라. 나라의 부끄러움과 백성의 욕을 저으기 알거늘, 이제 장군이 우리나라를 위하여 천리에 와서 구원하였는데, 순신이 도독을 영결하고 멀리 가서 숨고자 하는 것이 어찌 이같이 인정에 가깝지 않은 일을 행하리요마는, 비록 그러나 지금 진도독의 휘하 군졸의 노략질함을 본즉, 당당한 의로운 군대로 야만의 행실을 하니, 우리 이 불쌍한 생령이 저렇게 가혹한 화를 당한 끝에, 또 이 고초를 당하니 어찌 견디리요? 순신이 차마 이것을 볼 수 없는 고로 이에 가고자 하노라.” 진린이 이 말을 듣고 얼굴이 안색이 변하여 가로되, “린은 이로부터 휘하를 엄히 단속하여 터럭만치도 범하지 못하게 하리니, 장군은 잠깐 머물라.” 순신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다. 영문(營門)이 엄하여 우리 백성이 설혹 원통한 일이 있어서, 들어와 호소코자 할지라도 심히 어려우니, 도독이 비록 명찰하나, 어찌 휘하 군졸이 밖에 나가 작요(作擾)함을 일일이 살피리요? 도독이 만일 순신을 가지 못하게 하고자 할진대, 다만 한 가지가 있으니 도독은 즐겨 좇 겠느뇨?” 린이 가로되, “장군의 명대로 하리니, 장군은 말하라!” 순신이 가로되, “도독의 휘하 군졸이 우리나라에 구원하러 온 세력을 믿고, 기탄이 아주 없어서 이같이 방자한 행위를 함이니, 만일 도독이 나에게 권리를 빌려주어 그 죄를 다스리게 하면, 두 나라 군사와 인민이 서로 편안할까 하노라.” 진린이 가로되, “오직 장군의 명대로 하라!” 이후로부터 명나라 군사가 범하는 바가 있으면, 이순신이 진도독에게 묻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엄히 다스리니, 백성이 안도하며 명나라 군사가 순신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기를 진도독을 두려함보다 더하더라. 18일에 적선 100여 척이 녹도(鹿島)를 와서 침범한다고 정탐병의 보고가 왔거늘, 이통제사와 진도독이 각각 전선을 거느리고 금당도(今堂島)에 이른 즉, 다만 적선 2척이 있다가 우리 배를 바라보고 도망하는지라. 이통제사는 배 8척을 도발하고, 진도독은 20척을 출발하여 절영도에 매복케 하고, 함께 돌아오니라. 24일에 순신이 운주당(運籌堂)에 주연을 배설하고, 진린을 청하여, 서로 술을 권할새, 진린의 휘하 천총(千總)이 와서 고하되, “새벽에 적선 6척을 만나, 조선 수군이 몰수 포획하였나이다.” 하니, 진린이 크게 노여 꾸짖어 나가라 하거늘, 이순신이 그 뜻을 알고 좋은 말로 권하며, 그 얻은 바 적선과 왜적의 머리 69급을 모두 진린에게 넘겨주며 가로되, “도독이 이에 이른 지 수일이 못 되어 즉시 큰공을 조정에 아뢰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리요?” 하니, 진린이 대희하여 종일토록 취하고 노니라. 이후로부터는 진린이 순신을 더욱 흠복하며, 또 자기의 선척이 비록 많으나 도적을 대적하는데 넉넉지 못함을 깨닫고, 우리의 선척에 올라서 이순신의 절제(節制)를 받고자 하며, 항상 부르기를 ‘이야(李爺)!’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더라. 9월 14일 후로 각처 적장이 순천에 있는 소서행장의 진으로 모이거늘, 순신이 그 거두어 가려함을 이미 헤아리고 개연히 탄식하여 가로되, “내 어찌 천고의 원수 되는 도적으로 하여금 살아 도망감을 허락하리요?” 하고, 이날에 진린과 함께 수군을 거느리고 19일에 좌수영 앞을 지나, 20일에 순천 예교(曳橋)에 이르니, 이곳은 소서행장의 진앞이라. 군사를 사면으로 배치하여, 도적의 돌아가는 길을 막고 정예한 기병을 보내어, 장도(獐島)를 엄습하여 도적의 양식을 점탈하니라.          제15장 왜적의 말로 (1)풍신수길의 죽음과 우희다수가의 도망 (2)행장과 청정의 애걸 (3)명나라의 구원 (4)이순신의 교제 (5)이순신의 도적으로 더불어 함께 없어지리라 하는 결심 풍신수길이 ‘한 번 뛰어 대명국(大明國)을 답평한다’하는 쾌담을 발하여 길을 빌어서 괵국(虢國)을 멸하던 계교를 써서 우리나라를 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매, 즉시 우희다수가와 가등청정과 소서행장 등 제장을 보내어 30만 군을 거느리고 세 길로 호호탕탕히 조선을 향하여 올 새, 그 발발한 욕심이 팔도를 한 번에 삼킬듯이 하다가 거연히 경상·전라도 바다 어구에서 하늘이 내리신 일대 명장에게 막힌 바가 되어, 수로로 향한 모든 왜병을 어복 중에 장사하고, 분기 대발하여 8년을 두고 계속하여 군사를 파송하여 싸우다가 연하여 패하매, 이에 피를 토하고 죽으니, 양국간 전쟁이 저으기 결말 될 기회가 돌아왔더라. 수군의 승첩을 장담하던 우희다수가는 이에 이르러, 그 패할 줄을 미리 알고 군사를 버리고 먼저 도망하였는데, 행장과 청정은 내지에 깊이 들어왔다가 육지에 오르면 의병이 둘러싸고, 물로 내려간즉 삼도 수군이 막히어 진퇴유곡의 경우를 당하였는데, 행장은 순천(順天)에 둔쳤으며, 청정은 울산(蔚山)에 둔치고, 각지로 향하여 싸우려다가, 청정은 도원수 권율과 이덕형(李德馨)에게 에워싸인 바가 되어, 도산성(島産城)중에서 물 한 잔을 얻어마시지 못하고 여러 날을 곤하게 지내며, 행장은 전라도에 있어 그 형세로 대적하지 못할 줄을 헤아리고, 여러 번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청하더라. 왜적과 불공대천하기로 깊이 맹세하던 이순신이 어찌 저희 화친의 청구함을 허락하리요? 사자를 거절하고 더욱 군사를 나아가 도적의 진을 핍박할 새, 선묘조(1589) 무술 6월 27일에 고금도(古今島)로 진을 옮기니, 이는 전라도 바다 어구에 제일 요해처이러라. 승군을 모집하여 각지에 주둔하며, 농민을 모아 섬 중에서 농사를 짓게 하고, 정예한 기병을 나누어 사처로 보내어 돌아다니며 노략질하는 도적을 초멸하고, 행장과 청정을 깊은 천참에 가두어 두고, 그 군사가 주리고 기운이 다하거든 소멸하기로 계교를 정하더니, 7월 16일에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이 수군 5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내려와서 우리 군사와 합하니, 수군의 형세가 일층 장하더라. 그러나 진린은 원래 성품이 사납고 노하기를 잘하는 자로 유명한 사람이라. 그 나라의 동렬되는 제장과도 서로 좋아하는 자가 없으니, 하물며 언어도 통치 못하고 풍속도 같지 아니한 타국 장수와 시종 틀림이 없기를 어찌바라리요. 두 장수가 한 번 틀리면, 두 나라 군사가 필연 요동되리니, 두나라 군사가 한 번 요동이 되면, 저 왜적을 토평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그틈을 타서 우리 군사를 해롭게 하기가 쉬울지라. 그런고로 조정이 근심하고 주상께서도 진린을 후대하라시는 성지를 내리시며, 영의정은 진린을 잘 사귀라는 친필 편지를 하였더라. 비록 그러나 이통제사는 심중에는 이미 다 정한 계교가 있어서, 유인의 수단으로 진린을 대접하더라. 진린의 군사가 처음 이르매, 이순신이 즉시 소를 잡고 술을 내어, 진린의 제장을 대접하여 크게 인심을 열복케 하더니, 얼마 아니하여 그 군사가 사면으로 나가서 우리 백성의 재물을 노략질하는지라. 이순신이 군사와 백성에게 영을 내려 여간 집들을 모두 훼철하여 옮기게 하고, 자기도 금침과 의복을 모두 배로 옮기더니, 진린이 그 곳곳에 가옥을 훼철하는 광경을 보고, 심히 괴이히 여겨 사람을 이순신에게 보내어 묻거늘, 순신이 가로되, “도독의 휘하 군졸이 다만 노략질하기로 일삼으니 인민이 견디기 어려우므로 각각 집을 거두어 멀리 떠나려 한즉, 나는 장수가 되어 무슨 면목으로 홀로 이에 머물러 있으리요. 그러므로 나도 또한 진도독을 하직하고 멀리떠나려 하노라.” 진린이 이 말을 듣고 대경하여 급히 순신의 전에 이르러, 순신의 손을 잡고 가로되, “만일 장군이 가면, 린은 누구로 더불어 도적을 방비하리요?” 하며 간걸하거늘, 순신이 이에 강개히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우리나라가 왜적의 화를 입은 지 지금 8년이라. 우리 성읍(城邑)을 불사르며, 우리 인민을 살해하고, 우리 분묘를 발굴하며, 우리 재산을 약탈하여, 부모는 그 자손을 부르고 통곡하며, 부녀는 그 남편을 생각하고 통곡하고, 가옥이 있는 자는 그 가옥을 잃으며, 재산이 있는 자는 그 재산을 잃어서, 이제 팔도 인민이 왜병이라 하는 말만 들어도 모두 심골이 아프지 않을 리가 없으니, 순신이 비록 준준한 일개 무부(武夫)에 지나지 못하나, 또한 천성을 갖춘 자이라. 나라의 부끄러움과 백성의 욕을 저으기 알거늘, 이제 장군이 우리나라를 위하여 천리에 와서 구원하였는데, 순신이 도독을 영결하고 멀리 가서 숨고자 하는 것이 어찌 이같이 인정에 가깝지 않은 일을 행하리요마는, 비록 그러나 지금 진도독의 휘하 군졸의 노략질함을 본즉, 당당한 의로운 군대로 야만의 행실을 하니, 우리 이 불쌍한 생령이 저렇게 가혹한 화를 당한 끝에, 또 이 고초를 당하니 어찌 견디리요? 순신이 차마 이것을 볼 수 없는 고로 이에 가고자 하노라.” 진린이 이 말을 듣고 얼굴이 안색이 변하여 가로되, “린은 이로부터 휘하를 엄히 단속하여 터럭만치도 범하지 못하게 하리니, 장군은 잠깐 머물라.” 순신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다. 영문(營門)이 엄하여 우리 백성이 설혹 원통한 일이 있어서, 들어와 호소코자 할지라도 심히 어려우니, 도독이 비록 명찰하나, 어찌 휘하 군졸이 밖에 나가 작요(作擾)함을 일일이 살피리요? 도독이 만일 순신을 가지 못하게 하고자 할진대, 다만 한 가지가 있으니 도독은 즐겨 좇 겠느뇨?” 린이 가로되, “장군의 명대로 하리니, 장군은 말하라!” 순신이 가로되, “도독의 휘하 군졸이 우리나라에 구원하러 온 세력을 믿고, 기탄이 아주 없어서 이같이 방자한 행위를 함이니, 만일 도독이 나에게 권리를 빌려주어 그 죄를 다스리게 하면, 두 나라 군사와 인민이 서로 편안할까 하노라.” 진린이 가로되, “오직 장군의 명대로 하라!” 이후로부터 명나라 군사가 범하는 바가 있으면, 이순신이 진도독에게 묻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엄히 다스리니, 백성이 안도하며 명나라 군사가 순신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기를 진도독을 두려함보다 더하더라. 18일에 적선 100여 척이 녹도(鹿島)를 와서 침범한다고 정탐병의 보고가 왔거늘, 이통제사와 진도독이 각각 전선을 거느리고 금당도(今堂島)에 이른 즉, 다만 적선 2척이 있다가 우리 배를 바라보고 도망하는지라. 이통제사는 배 8척을 도발하고, 진도독은 20척을 출발하여 절영도에 매복케 하고, 함께 돌아오니라. 24일에 순신이 운주당(運籌堂)에 주연을 배설하고, 진린을 청하여, 서로 술을 권할새, 진린의 휘하 천총(千總)이 와서 고하되, “새벽에 적선 6척을 만나, 조선 수군이 몰수 포획하였나이다.” 하니, 진린이 크게 노여 꾸짖어 나가라 하거늘, 이순신이 그 뜻을 알고 좋은 말로 권하며, 그 얻은 바 적선과 왜적의 머리 69급을 모두 진린에게 넘겨주며 가로되, “도독이 이에 이른 지 수일이 못 되어 즉시 큰공을 조정에 아뢰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리요?” 하니, 진린이 대희하여 종일토록 취하고 노니라. 이후로부터는 진린이 순신을 더욱 흠복하며, 또 자기의 선척이 비록 많으나 도적을 대적하는데 넉넉지 못함을 깨닫고, 우리의 선척에 올라서 이순신의 절제(節制)를 받고자 하며, 항상 부르기를 ‘이야(李爺)!’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더라. 9월 14일 후로 각처 적장이 순천에 있는 소서행장의 진으로 모이거늘, 순신이 그 거두어 가려함을 이미 헤아리고 개연히 탄식하여 가로되, “내 어찌 천고의 원수 되는 도적으로 하여금 살아 도망감을 허락하리요?” 하고, 이날에 진린과 함께 수군을 거느리고 19일에 좌수영 앞을 지나, 20일에 순천 예교(曳橋)에 이르니, 이곳은 소서행장의 진앞이라. 군사를 사면으로 배치하여, 도적의 돌아가는 길을 막고 정예한 기병을 보내어, 장도(獐島)를 엄습하여 도적의 양식을 점탈하니라. 


왜적의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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